이야기의 이야기

가끔씩 그냥 이야기가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쓴다는 것, 써서 무언가 풀어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임새가 전혀 없는 것은 쓰고 싶지 않다. 그래서 무언가 만들어낸다. 환상을.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그린다. 내가 가졌다고 착각했던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든다. 이것을 아무리 반복해도 나는 그것들을 가졌던 적이 없는 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다. 그러한 것들을 쓴다는 행위로부터 무력한 자신을 용서해 가는 것을 깨닫는다. 너무나도 무력해서 그런 것을 써버리는 스스로를 변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써버리는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부끄러움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이 죄책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외계를 향한 것이라는 듯이.

한 사람이 살았다. 편의상 A라고 해두자. A는 소심증 환자라고 할 수 있을만큼 소심했고 건망증 환자라고 볼 수 있을만큼 멍청했다. 게다가 우울증 환자라고 진단 받을 수 있을만큼 우울했다.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느릿느릿하지만 착실히, 자신이라고 할만한 것을 쌓아올려갔다. 그 결과 그는 남들이 어리다고 할 나이를 지났을 때 바람구멍이 몇 개 정도 난 자아가 완성되어 있었다. 허파에 바람이 든 것 같이 내실이 없었고 바람둥이라는 말을 들을만큼 풍벽이 있었다. 뇌의 일부분은 풍을 맞은 것처럼 경직되어 아예 작동하지 않았고 그래서 간만 부어올라 스스로의 식별자에 바람을 끼워넣곤 했다. 지식은 가벼웠다. 통찰은 비어있었다 - 목적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압의 양극단을 바람의 통로라고 상정하면, 바람은 좀체로 도착하지 못한다. 수평면 상에서 극단도 수직면 상에서는 도중에 불과하다. 바람은 쉬지 못한다. 심지어 그 자신을 이루고 있는 입자들조차 고유하지 못하다. 그렇게 바람은 지칭되지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A는 그러했다. 그 점에서만큼은, 그의 텅 빈 통찰이 가장 그 자신스럽게 되다 못해 스스로를 간파해 버리고 있었다.

삶이 무료해질 때 쯤 그는 외계로 그 관심을 돌렸다. 그의 내계는 이런 저런 당위와 여러 가지 사회화의 염이 섞여 있는 혼돈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것이 그저 멈추지 않는 억압의 소용돌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그는 그것을 그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료해진 그는 외계로 관심을 돌렸다. 내부에 창을 내어 신과 소통하는 대신 외부에 창을 내어 자신과 다르게 고유한 사람을 수입해 오고자 했다. 사람들은 명멸하듯 빠르게 지나쳐 갔다. 활기는 메말라갔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뽑아냈다. 부패한 활기라는 것은 말라빠진 지혜를 주었고, 갈증은 다른 지혜를 갈구했다. 더 많은 사람을 바랬다. 더 고유한 사람을 바랬다. 자신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깊은 사람을 바라면서도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사람을 바랬다. 그리고 이윽고 만났던 것이다. B.

B,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자의 따위는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바람이었던 A에 비하면 B는 자의로 자신의 쓸모를 포기한 돌멩이였다. 그는 단단했고 쉬이 지치지 않았다. 심지어 닳은 부분에선 반짝반짝 윤도 났다. 보석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주는 것은 스스로 줄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숨가쁘게 달리면서도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이 안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갑자기 멈추어 서야 할 때가 오더라도, 마치 처음부터 자신은 가만히 서있었다는 듯이 발을 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 발은 항상 볼 수 없는 뒤에 있었다. 그래서 A는 B에 기댔다. B의 남은 한 발은 매우 신비했다. 그것은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A는 매료되었다. 두 발 모두 공중에 떠 있는 그에게 B의 보이지 않는 한 발은 마치 우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선망, 갈구, 집착했다.

이윽고 예정대로, 혹은 계획대로, 혹은 미리 조심했던 바처럼 B는 멈췄다. A가 기댔던 B의 다리는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A는 허공에 떴다. B에 기댔던 동안 B의 무게를 빌렸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더 높이 떴다. 사람들을 잡을 수 없을만큼, 그리고 사람들이 잡을 수 없을만큼 높이 떴다. 마치 실 끊어진 연 같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계속 날았다. 날다 보면 언젠가 떨어지겠지 기대하면서 새된 목소리로 자신을 억압했다. 그는 자신의 신이 되었다. 단죄는 무겁고 달았다.

A에겐 아직도 문신처럼 차꼬가 채워져 있다. 그것은 때때로 속삭인다. “나는 모순을 사랑하지 못하는 모순덩어리야”, “우리는 성공적으로 사회에 기생할 거야.” A는 이제 그것들이 B의 말이었는지 A의 말이었는지 알 수 없다. A는 이제 바위를 꿈꾼다. 낙뢰에도 끄떡 않을 튼튼하고 육중한 바위. 연처럼 혹은 종이비행기처럼 그 바위가 난다. 그 바위에는 보석처럼 형광 페인트를 묻힌 자국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위는 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건 A도 나도 정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by | 2012/06/19 19:21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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